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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 연극 배우

by 플레이앤라이프 2022. 11. 17.

배우 장민호

 

 

생애와 작품 활동

황해도 신천 출신.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명신중학교(황해도 재령 명신고 등보 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명신중학교 재학 시절 연극에 흥미를 느껴 배우의 꿈을 키웠다. 1945년 해방 후 월남하여 배우 출신 번역가 현철(1891~1965)이 세운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하여 연극 이론과 연기술을 배웠다. 1953년 국립극단의 전신인 극단 신협에 들어가 연기활동을 시작했다. 1947년에는 원예술좌의 성극 <모세>에서 주연배우의 대타로 출연해 무대에 처음 섰다. 드라마센터 첫 공연 <해믈리트》>에서 햄릿의 삼촌 왕, 장충동 국립극장 첫 공연 <성웅 이순신>에서 이순신, 세종문화회관 첫 공연 <북벌>에서는 효종 역을 연기했다. 

 

 

고 장민호 배우 뉴시스 화면 캡처

 

 

 


1947년에 중앙방송국 전속 성우로 입사했다. 대중들에겐 원로 연기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전문 성우 중 한 명이다. 당시에는 성우라는 말은 없었다. 광복 이전에도 한국어 라디오 방송극은 존재했지만 목소리 연기는 주로 복혜숙 등 기존 연극배우들이 맡았다. 1958년에는 제1회 방송문화 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연극배우 초년생 시절에는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 프세볼로트 메이예르 홀트 등의 연기서를 탐독해가며 이들의 연기술을 익혔다. 그는 온화하고 기품 있는 외모와 정확한 발성법을 기반으로 연극 및 라디오 드라마에서 주연 배우로 성장한다. 특히 이광래 주도의 제3무대에 참여해가며 <젊은 그들>, <민족의 전야> 등지에 나왔고, 1949년 한운사, 조남사, 최무룡, 민구 등과 함께 '청막 극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성우로서도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되는데 저음의 목소리를 십분 활용해 <똘똘이의 모험> 등에 나오며 최고 출연 횟수를 기록, 토월회 출신의 당시 방송국 연예계장 이백수에게 낭독법을 전수받아 <삼국지>의 연속 낭독으로 인기를 구가했다.


1951년부터는 대구로 내려가 김동원, 황정순 등과 함께 이 극단의 간판 배우로서 <목격자(1951)>의 가스, <줄리어스 시저(1953)>의 안토니오 등으로 인기를 얻었다. 1953년 휴전 후 1956년 유현목 감독의 데뷔작 <유전의 애수>를 시초로 은막에서도 모습을 드러내며 영화-연극-성우계를 망라하는 멀티 엔터테이너가 됐다. 하지만 주 무대는 언제나 연극이었으며 이해랑이 연출을 맡은 작품에 많이 나왔다.


연극 <대수양(1959)>, <안네의 일기(1960)>에 각각 나오며 대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62년 국립극단 재창단 시 합류했으나 이후 드라마센터를 거쳐 1967년 국립극단으로 재합류 후 백성희와 함께 간판 배우로 맹활약해왔다. 특히 1966년부터 총 4번 <파우스트>의 동명의 주인공 역을 맡아 '파우스트 장'이란 별명을 얻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1969)> 및 <성웅 이순신(1972)>, <징비록(1975)> 에선 3차례 이순신 역을 맡기도 했다. 또한 1986년에는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 연극에서는 수십 편에 걸쳐 저력 있는 연기를 과시, 한국 연극의 과묵한 무대 연기자로 각광을 받았다. 파우스트의 연기가 뛰어나 ‘파우스트 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2004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이진석(원빈)의 노년기를 맡았으며, 2010년에 MBC 드라마 <로드 넘버 원>에서 이장우(소지섭)의 노년기를 맡기도 했다. 1967~1972, 1979~1991년까지 두 차례 국립극단 단장을 맡아 연극계의 여건 개선에 힘썼다. 2010년에 은관 문화 훈장을 받았으며, 2011년 서울 용산구 서계동에 자신과 백성희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극장이 개관하게 된다. 2012년 11월 2일, 1년 5개월 동안 앓던 폐기흉으로 인해 8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장례는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연극인장으로 거행됐다.


 

 

배우 백성희

 

생애

 

한국 연극계의 거목으로 본명은 이어순이(李於順伊)다. 1925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고를 다니면서 부모님 몰래 빅터무용연구소 연구생으로 활동하다가, 1943년 18세의 나이로 현대극장에 입단했다.  
연극 <봉선화>로 데뷔한 이후 낙랑극회, 극단 신협 등에서 연기하다가 1950년 국립극단 창립 단원으로 입단했다. 72년 첫 단장 선거에서 최연소 여성 단장으로 뽑혔다. 그녀는 창립 단원 중 유일하게 평생 동안 국립극단의 단원으로 활동했다. 2011년 국립극단은 그를 기리기 위해 새로운 극장을 개관하고 ‘백성희장민호극장’이라고 이름 붙였다.

 

 

 

고 백성희 배우 사진 화면 캡처

 



작품 및 평가

고인은 작품은 가리지만 배역은 가리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70여 년간 연극 400여 편에 출연했다. 이후 2013년 건강이 악화돼 <3월의 눈>과 <바냐 아저씨>를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후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2015년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인 회고록 <연극의 정석-백성희의 삶과 연극>을 발표했으며, 2016년 작고 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일정한 역만 하지 않고 어떠한 역도 할 수 있는 무대 연기자로 평가되었다. 대표적 출연 작품으로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다이얼 M을 돌려라>, <신앙과 고향>,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 <엄마의 모습>, <마을의 봉팔이>, 등이 있다. 1945년에는 <봉선화>, 1946년 <군도>, 2001년에는 <봄날은 간다>에서 할머니 역을 하기도 했다. 


수상

5월 문예상(1회), 한국 연극상(1회·8회), 3·1 연극상(2회), 동아연극상(3회), 한국연극인기상(8회) 등을 받았다. 1999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 2010년에는 은관 문화 훈장을 수상하였다.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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